
기념물 건립
1.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탑
1. 기공 및 제막 | |
1885년 부활절 당일 아펜젤러부부와 언더우드선교사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인천에 처음 도착한 것을 기념하고 이들의 순교자적 선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이 선교100주년의 해인 84년 11월 19일 인천직할시 해안로에서 기공, 86년 3월 30일 준공되어 제막식과 함께 그 웅자를 드러냈다. 장원모목사 사회로 열린 제막식은 1부 예배, 2부 제막식으로 진행, 1부에서는 이복희목사의 '1885년 4월 5일'이라는 말씀에 이어 한경직총재의 인사가 있었다. 2부에서는 충의소년단 취주악대의 축하연주에 이어 기념탑 제막, 경과보고, 기념문 낭독, 강원용목사의 기념사 순으로 진행, 아펜젤러선교사 가족과 언더우드선교사 가족에게 예물이, 신동아건설 · 윤영자교수 · 김찬회 인천시장에게는 공로감사패가 전달되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3천여명이 참석했으며 식이 끝난 후에는 축하다과회도 있었다. ![]() < 인천에 있는 100주년 기념탑 > 높이 17m, 구조물면적 50평 규모인 이 기념탑은 83년말 인천기독교연합회의 건의에 따라 84년초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공동건립키로 결의, 3억여원의 건립경비를 두 단체가 공동부담하여 세웠다. 기념비의 틀과 조각은 목원대 윤영자교수의 작품이고 기념문은 전택부장로가 지었으며 신동아건설(주)이 시공했다. 한편 84년 11월 19일에 있은 기념탑 기공식에서는 강원용목사(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대표회장)가 '지혜로운 건축사'란 설교를 했으며 당시의 인천시장 김찬회씨의 치사, 강병혼목사(본 협의회 사무총자)의 인사 등이 있었다. | |
2. 기념탑 개요 | |
건립취지 | |
아펜젤러부부와 언더우드선교사가 한국선교의 역사적 소명을 띠고 항로 인천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 1885년 부활절 당일, 그러니까 한국개신교는 올해로 선교2세기의 첫 해를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모진 박해와 수난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유례없는 기적을 이루며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형극의 시대를 이겨온 매 순간들이 다 지울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만 백년 전 부활절 당일의 이 역사적 상륙이야말로 한국교회사에 영원한 기념비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전도를 측량할 길 없는 황무한 땅에 닻을 내린 이들의 숭고한 순교자적 선교정신을 기리며 지나간 한 세기를 정리하고 다가올 새 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자세를 정립코자하는 1,000만 성도의 뜻이 모여 여기에 이 기념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 |
구조물의 뜻 | |
1. 100주년 기념탑은 상징적인 기념물로서 17m, 구조물 면적 50평 규모로, 중앙 상단에 3인의 청동조각상을 두고 3개의 탑신과 6면의 부조 및 원형의 석조 계단으로되어 있다. 2. 탑의 전체적인 모양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종의 형태에서 본뜬 것이며 성부 · 성자 · 성신을 상징하는 3개의 탑신이 한 점에서 만나 하늘을 향하고 있는 형상은 삼위가 일체이듯 한국교회가 하나로 뭉쳐 신앙이 하나님께로 승화됨을 의미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온 누리에 두루 전파될 것을 비는 우리의 염원을 담고 있다. 3. 이 조형물의 모습은 교회의 거룩한 제단을 연상케 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조형되었다. 4. 원형계단은 복음의 종이 울려 퍼져 방방곡곡에 전파됨을 상징하며, 시각적으로는 영원한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져 만민의 심금을 울리는 복음이 하늘과 땅에 충만케 됨을 의미 한다. 5. 2.7m높이의 3인 청동조각상은 맨 처음 인천에 상륙한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상으로서, 중앙에 손을 들고 있는 남성은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기도하는 여인상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충만하기를 비는 모습으로 한국선교에 시금석이 된 분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6. 탑신 전면의 양쪽 부조물은 부활의 환희에 찬 성도들의 모습으로, 바로 부활절 당일에 첫 상륙한 것을 뜻하며, 축복받은 한국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형태로 묘사했다. 탑신 중심 상부에는 주물로 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이란 글이 돌 위에 부착되고, 십자가는 항상 빛을 발하는 느낌을 주도록 스텐레스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3인 청동상 아래 원형계단 위에는 세 분이 상륙 직후 드린 기도문이 금속으로 제작되어 부착됨으로 이 기념물의 의미를 그 조형적인 형태와 더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배려 했다. 7. 탑 하부 6면의 부조상은 그리스도의 복음 이 비로소 한국에 전파되어 복음화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도록 하였으며 이 땅에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한국교회 초기 성도들의 선교활동상을 담았다. | |
구조물의 규모 | |
1. 전체조경면적 : 200평. 2. 탑구조물면적 : 약 30평(직경 14m). 3. 탑 높이 : 17m. . 중앙입체청동상 : 높이 2.7m 3인상. 5. 부조석조각 : 탑신 벽체 하단부 부조 5면에 약 70평의 인물조각이 들어가며 높이 2m 이내. 6. 십자가 : 길이 1.3m 스텐레스. 7. 기도문 : 주물로 제작하여 돌 위에 붙임. 8.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 주물로 제작하여 중앙탑 일면에 부착함. 9. 기록문 : 탑신 1면에 국문과 영문으로 새겨짐. 10. 조경공사 : 150평. 11. 전기공사 : 구조물에 밤에도 비칠 수 있도록 조명장치. 12. 진입로 : 8m. | |
건립경위 | |
1983. 11. 5 : 인천기독교연합회에서 100주년기념탑 건립을 결의. 기념사업협의회에 건의함. 1984. 1. 27 :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제4차 정기총회에서 기념탑을 인천기독교연합회와 공동 건립키로 결의. 1984. 5. 10 : 인천직할시로부터 건립부지 사용 승인을 획득. 1984. 11. 19 : 기공식 거행. 1985. 7. 30 : 탑신 및 조경 1차 준공. 1986. 3. 15 : 동상부분 조형 완료. 1986. 3. 30 : 제막식거행, 인천직할시에 기증. | |
건립 경비 | |
공사비 : 121,000,000 조형물 : 179,578,300 조경비 : 4,754,545 계 : 305,332,845 ※ 총경비 : 3분의 2는 인천기독교연합회에서 충당함. |
2.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
1. 헌당식 | |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역대 선교사들과 서구문물을 전해준 구미인사들의 유덕을 기리고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하는 선교기념관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 안에 세워져 86년 10월 10일 헌당식과 함께 개관됐다. 이날 오후 2시부터 기념관 2층 예배처소에서 열린 헌당식에는 윤보선 전대통령내외 · 염보현서울시장 · 윤치영장로 · 김일환장로 · 오재경씨 · 이동원씨 · 봉두완의원 · 노승환의원 등 전 · 현직 정계인사, 언더우드박사와 사우어교수 등 50여 명의 초대선교사 후손들, 그리고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 협의회이사장 한경직목사를 비롯, 강원용 · 정진경 · 서병주 · 림인식 · 박종성 · 신신묵목사와 전택부 · 최태섭 · 최창근장로 등 원로급 교계 지도자들과 평신도 등 모두 500여명이 참석했다. 강병훈목사가 사회한 헌당식은 묵도와 샤롬여성성가단의 송영으로 시작되어 최훈목사의 축도, 최태섭장로의 성경봉독, 강원용목사의 말씀, 오건장로의 건축경과보고, 한경직목사의 봉헌사, 정연희집사의 기념비문 낭독, 염보현시장의 축사, 원일한박사의 감사의 말씀, 서병주목사의 축도 등의 순으로 진행된 뒤 외국인연합교회가 준비한 축하연이 있었다. ![]() <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 > 한경직목사는 헌당식에서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를 대표하여 기념관 건립에 노고가 켰던 김광욱 동양건축사무소장 · 이준삼풍건설사장 · 이창준이사 · 임효일 호록원대표 · 이강필집사 등 5명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기념관 건립을 지원한 정이숙권사 · 박용학회장 · 김우중회장 · 정주영회장 · 장치혁회장 · 김덕윤권사 · 백성학사장 · 최창근장로 · 홍순기장로 · 황규빈회장 · 최순영장로 · 조용기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 정태성장로 · 이병익장로 등 15명에게 회원패를 수여했다. 헌당식 직전 교계지도자들과 내외귀빈들은 기념관 준공에 때맞추어 정연희집사의 글을 새겨 기념관 앞뜰에 세운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헌당식에서는 "헌건사"가 낭독되었다. 헌건사 : "우리 재단법인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선교기념관 건축과 외국인묘지공원 조성의 거룩하고도 거대한 일을 작정하고 건축위원으로 맡겨 주셨으므로 부르심에 감격하여 한국교회와 유지들이 기도와 정성을 다하여 협조하여 주셨으므로 모든 공사를 은혜 가운데 마치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건축한 이 선교기념관은 영원토록 주님의 것입니다. 본 건축위원회는 이 새로 지은 선교기념관 열쇠를 재단법인 책임자이신 이사장님께 드리오니 하나님을 예비하며 많은 심령을 구원하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 내시기를 빕니다." (1986년 10월 10일 건축위원장) | |
2. 기념관개요 | |
건립취지 및 건립경위 | |
양화진 외국인 묘지 공원내에 들어선 선교기념관은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역대 선교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선교업적을 길이 기념하고 아울러 개화기에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한 구미 각국 인사들의 업적에도 감사하는 뜻으로 세워졌다. 1985년 1월 14일 제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는 제5차 총회에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양화진외국인 묘역에 기독교 100주년을 기리는 큰 사업의 하나로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을 건축키로 결의,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6월 28일 기공예배와 함께 공사에 착수했다. 1년 2개월만인 1986년 8월 20일에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준공되고 9월 10일까지 조경공사까지 완료, 10월 10일에는 헌당예배 가 있었다. | |
규모 및 시설 | |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비로 5억 2천 5백만원 ·조경비로 3천만원, 총 5억 5천 5백만원이 쓰여진 선교기념관은 조형면적 1천 5백평, 지하 1층 · 지상 3층에 연건평 350평의 규모로 묘지공원 동쪽언덕에 2호선 전철과 한강을 마주보고 거대한 탑과도 같이 우뚝 솟아있어 양화진 일대의 빼어난 경관과 한데 어울려 보는 이들에게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게 해준다. 전면의 외관은 합죽선을 펴듯 가장 높은 중심선에서 약간 후진하며 종으로 단(段)을 이루어 연속성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을경배하는 자세가 강조되었다. 건물 외부재료는 우리나라 고유의 내구성이 강한 화강석을 사용해 기념성과 상징성을 드러냈고 주요 창문은 스테인드 글래스를 사용하여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이 기념관은 동양건축주식회사의 설계와 감리로 삼풍건설주식회사가 시공했으며 기념관 준공에 때맞취 기념관 앞뜰에 세워진 기념비문은 소설가 정연희집사가 지었다. | |
선교기념관 개요 | |
1. 착공 : 1985. 6. 28 2. 헌당 : 1986. 10. 10 3. 조형면적 : 1,500평. 4. 연건평 : 350평(지항 1층 · 지상 3층). 5. 공사비 : 5억 5천 5백만원. 6. 건물내용 1층 : 선교기념실 · 자료전시실 · 사무실. 2층 : 대강당 · 예배소(3층 일부포함). 3층 : 회의실 · 교육실 · 목회자실. 지하 : 식당 · 친교실 · 다목적실 · 기관실 | |
건축위한 재정위원회 | |
위원장 : 최창근 부위원장 : 김경래, 유상렬 위원 : 강병훈, 강성모, 고평식, 김덕윤, 김동수, 김인득, 박순양, 박용학, 박치순, 서정한, 신영균, 양광석, 유상근, 이병익, 이형자, 장치혁, 정해숙, 주경효, 최기만, 최태섭, 최 훈 | |
건축위원회 | |
위원장 : 최순영 부위원장 : 이창로, 오 건 위원 : 김일환, 김정철, 박창원, 배태준, 이 준, 정이숙, 지원상 상임이사 : 강병훈 사무국장 : 전재성 담당실무국장 : 김경래 | |
3. 선교기념관 용도 | |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1986년 10월 10일 선교기념관 헌당식 후 자체의 사무실을 선교기념관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보류하고, 당시 일정한 예배처소가 없었던 외국인연합교회(서울유니온교회)가 선교기념관 전체를 단독 예배당으로 무상 사용토록 배려했다. 그 후 2005년 7월 부터는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양화진과 용인 순교자기념관 관리를 위하여 세운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와 공동으로 선교기념관을 예배처소로 사용하였는데, 2007년 8월 선교기념관의 합법적 용도는 "묘지관리 사무소"임을 확인한 마포구청은 "선교기념관의 예배당 용도 사용불가"를 통보하여 왔다. 그 이후 현재 선교기념관은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사무실 및 회의실, 양화진연구원, 양화진 참배객 안내, 비정기적 선교사 추모예배 용도 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양화진에 묻히신 선교사들의 헌신을 기리고 한국기독교 선교를 기념하는 본래의 건립 취지에 맞게 사용되어지고 있다. | |
4. 양화진의 유래 | |
양화진(楊花津)은 예로부터 20세기 초엽까지 한강 남쪽 경기도 연안의 매우 중요한 나루터로서 해상 운송에 큰 몫을 했으며 이조 영조 30년(1754)년에는 송파진 · 동작진 · 노량진 · 한강진과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5진(鎭)의 하나가 되어 군사적으로도 극히 중요한 자리였다. 1866년 병인년의 천주교박해 때 9명의 프랑스 신부를 비롯, 8천여명의 천주교도가 이곳 양화진 잠두봉(蠶頭峰)에서 처형당하자 프랑스 인도지나 함대가 한강으로 침입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이해 8월 프랑스 해군의 로즈제독은 2척의 군함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 양화진까지 정찰을 하고 간뒤 다음달에 다시 군함 7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여 정족산성싸움에서 패하자 강화성에 불을 지르고 한문서적등을 탈취하여 철수했었다. 천주교인의 대량 학살로 원래잠두봉 또는 덜머리(加乙頭), 용두봉(龍頭峰)등으로 불리던 언덕이름이 오늘날에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1880년대초 구미열강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굳게 닫혔던 쇄국의 문이 열리자 1884년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 1858 ~ 1932)이 처음 입국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 해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뒤따르는 등 미국의 선교사들이 잇달아 내한,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해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로서 고종의 시의(侍醫)이기도 했던 헤론(Joh W. Heron, 1850 ~ 1890)이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법에 따라 성내에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민간에서도 묘터를 팔려는 사람이 없어 묘지마련에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조선땅에서 사망하는 외국인은 1883년 제물포항 해안 언덕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마련된 외인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여름 염천에 거기까지 시신을 운구할 길이 없었으며 법을 어기 고 도성안에 매장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노롯이었다. 유족과 선교사들은 조선조정에 한성 가까이 묘지로 쓸만한 땅을 내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조정에서 묘지로 지정해준 곳은 한강 건너편 야산기슭 모래밭이어서 묘지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신을 밀봉하여 헤론이 살던 집 뒤뜰에 매장할 작정을 했으나 선교사들을 도와주던 서생들이 한사코 반대하였다. 이러던 중 미국공사관과 조선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렌이 어려운 교섭 끝에 경관이 아름다운 양화진 언덕을 사용토록 허가받아 이곳에 헤론을 처음 묻음으로써 오늘의 외국인묘지공원의 터를 잡게 되었다. 1986년 9월 현재 이 묘지에서 헤론을 비롯하여 개화기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 · 교육 · 의료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많은 외국인들과 고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어린 자녀 등 그 가족들이 애뜻한 노스탤지어를 달래며 잠들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란히 손잡고 펴던 선교사 부부도 있고 고국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날 때 육신을 한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이도 있다. 생전에 종사한 분야를 보면 선교사가 가장 많으나 다른 직업에 종사한 이들도 거의가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우던 이국땅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들었던 선각자들이 었다. 한편 4천여평의 이 묘역에는 선교사 75명을 포함하여 미국인 235명, 백계러시아인 54명, 영국인 30명, 프랑스인 25명, 호주인 12명, 일본인 1명 등 375명의 외국인들과 100여명의 고아를 포함, 120여명의 한국인 등 모두 500여명이 잠들고 있다. 이 묘역의 이름은 일제 때 경성구미인 묘지로 불리우다가 해방후 서울 외국인 묘지로 바뀌었고 86년 선교기념관의 건립과 함께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되었다. 그후, 양화진이 '한국개신교의 최고 성지'로 재 인식되면서, 2005년 양화진에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설립되었고 이 묘역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개명되었다. |
3. 순교자기념관
지난 100년동안 개신교가 선교사상 유례없는 급성장을 이룩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온 선교초기로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6 ·25에 이르기까지의 순교교역자와 성도들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기리며 또한 후세에 전승키위한 순교자기념관이 경기도 용인 내사면 추계리에 세워진다.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100주년사업후속사업의 하나로 정이숙 권사(영락교회)가 희사한 추계리 10만평의 임야내에 약 3억원을 들여 순교자기념관을 짓고 그앞에 약1억원을 들여 순교자기념탑을 건립키로 하고 약 4억원이 소요되는 토목 · 도로 확장공사와 함께 87년 4월경 이 공사를 시작한다.
양화진 선교기념관 규모의 단독건물인 선교기념관에는 200석규모의 강당겸 예배처소와 기독교미술 및 문화재전시실이 마련된다. 기념사업협의회는 이 전시실에 지난 한 세기동안에 꽃피워온 기독교 미술작품들과 문화재들을 소장자들로부터 기증 받거나 개인회사 등을 통해 수집, 전시함으로써 순교자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선교1세기를 한눈에 돌아보며 믿음의 선조들이 쌓아온 문화유산의 관람을 통해 신앙심을 가다듬게 되는 박물관의 몫을 하게 할 계획이다. 한편 이 임야내에는 한국교회연합 캠프장도 마련된다.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약 1만평의 경관 좋은 삼림내에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교회 및 교단, 기관규모의 수련회와 기도회 · 친목회 등 단체나 개인의 야회집회 또는 캠핑을 할 수 있도록 취사장 · 수도 · 전기 · 화장실 · 대피시설 등을 갖춘 연합수련장을 순교자 기념관 건립과 함께 조성한다. 이 공사에는 공용시설비 5천만원과 캠프장 조성비 1억원 등 약 1억 5천만원의 예산이 소요된다. |